이미 손 쓸 새 없이 탄저병이 퍼져 죽어가고 있는 파프리카 모종. ©김세련
‘농심은 천심이다.’
농심이란 농부가 자연의 이치에 따라 흙과 더불어 생명을 가꾸어 나가면서 터득한 농업의 정신을 일컫는다. 그럼 천심은 뭘까. 쉽게 말하면 하늘의 마음 정도일까. 아니면 하늘을 올려다보며 농부가 갖는 마음을 일컫는 걸까.
비구름 한 점 없는 마른하늘을 바라볼 적이면 무심한 하늘이라고, 비 좀 시원하게 내려달라고, 타들어가는 여린 농작물을 보며 오늘 내일 말라죽을까봐 근심 걱정 하게 되고, 비가 도통 그치지 않는 날이면 이번엔 뿌리가 썩을까 근심 걱정하게 된다.
그렇기에 농사는 천심이 후해야 수확물을 거둬들일 수 있고 풍년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런데 올해 여름은 천심이 참 따라주지 않은 모양이다. 매해 각오하고 있지만 늘 그 이상으로 더웠고, 이번엔 장마도 길었다. 잠깐 내리는 소나기조차 얼마나 퍼붓던지. 그래도 주렁주렁 예쁘게도 열리는 수확물에 올해 풍년은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채소 맛은 보겠구나 하고 섣부르게 방심해버린 게 문제였을까.
식물이 무럭무럭 자라날 땐 병충해 하나 없더니 딱 수확물을 거둬들이는 시기에 전염병이 강하게 돌았다. 가장 피해를 많이 받은 것은 고추였고, 고추 옆에서 잘 자라던 파프리카도 몇 군데 크게 감염되어 손 쓸 새 없이 마구 번지고 있었다.
급하게 살펴 병든 것은 서둘러 떼어내 치워주었지만 대처가 미흡했는지 순식간에 병이 퍼져 이미 수확한 것에도 옮아 4분의 1이상 폐기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지독한 병은 탄저병이다.
잦은 비와 탄저병으로 하얗게 곰팡이 핀 과실. ©김세련
탄저병이 뭐길래.
쉽게 말하면 과육이 썩는 곰팡이 균이라고 할 수 있다. 탄저병은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는 6월 중하순부터 발생하여 8월과 9월 사이 고온 다습한 조건에서 증가하는데 주로 고추에 가장 큰 피해를 주는 병해충이다.
주로 과실에 발생하며, 과실에는 처음에 감염부위가 약간 움푹 들어간 원형반점으로 나타나고, 진전되면 병반이 원형 내지 부정형의 겹무늬증상으로 확대된다. 심하게 병든 과실은 비틀어지고 미라처럼 말라버린다. 성숙과의 병반은 간혹 흑색의 겹무늬증상을 띠는 것도 있으며, 수확 후 건조하는 과정에서 병증상이 나타나는 것도 있다. 수확물에 번지는 경우는 하얗게 곰팡이 피듯이 번진다.
탄저병은 어떻게 감염되는 걸까?
탄저병은 빗물에 튀어 전파된다. 올해 여름처럼 지속적인 비가 내리면 빗물이 땅에 스며들어 직접 고추에 옮겨갈 수 있고 바람으로도 균이 닿으면 감염된다고 한다.
종자로도 전염될 수 있는데, 특히 지난 해 버려진 병든 잔재물이 가장 중요한 1차 전염원이라고 보면 된다. 탄저병균은 과실에 부착된 후 조건이 맞으면 4시간 이내에 침입하고 4일 이내에 2차 전염원인 분생포자를 만든다. 그래서 비가 오는 날 탄저병의 99%가 전파된다고 보면 된다. 탄저병 감염이 되면 빠르면 사흘, 늦어도 열흘 후에 병 증상이 외부로 나타난다.
발생하기 쉬운 환경
시설재배 포장보다는 노지포장에서 병 발생이 심하다. 노지포장에서는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여름철 장마기에 분생포자가 주로 비바람에 의해 전반된다. 노지재배의 고추에서는 7월 초순부터 병이 발생하기 시작하여 수확기까지 계속 발생한다.
탄저병에 감염되면 먹을 수도 수확할 수도 없어 전부 버려야 한다. ©김세련
탄저병 예방은 어떻게 할 수 있나
가장 효과적인 고추 탄저병 방제는 식물에 빗물이 튀는 것을 막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비닐하우스 재배가 가장 좋으며, 고추 과실이 탄저병에 걸리게 되면 전염원이 무수하게 형성되므로 병든 과실이 보이면 즉시 제거해야 한다. 농약을 살포하는 것보다 제거하는 게 더 효과적이다.
병든 과실을 그냥 두거나 가까운 이랑 사이에 버리게 되면 방제 효과는 반절이상 감소하므로 재배지 청결이 가장 중요하다. 또한 재배할 때 작물의 간격을 띄우고 심고, 재배 식물의 하단 가지를 쳐서 바람을 잘 통하게 해주고, 물 빠짐이 잘 되도록 관리해주면 탄저병에 대한 저항성을 높일 수 있다.
이렇게 예방해줘도 한 번 퍼지면 제거밖에 큰 방법이 없어 새삼 농사란 게 사람 마음대로 잘 안 된다는 걸 여기서 다시금 느꼈다.
전년도 여름은 더위가 독했어도 장마가 길지 않아 탄저병이 없었다보니 올해 우리 집처럼 탄저병 피해를 크게 받은 집이 많은 모양이다. 탄저병의 원인은 이상기온으로 추정되는데, 가을까지 이어진 폭염과 긴 장마가 탄저병을 확산하게 만든 주 원인으로 보인다.
이상기후 재해에 따른 탄저병은 농작물 재해보험 대상에서 제외되어 피해 보상도 막막한 상황이라던데. 너무 풍년이면 헐값에 팔아야 하니 마음이 아프고, 너무 흉년이면 판매할 것도 입에 풀칠할 것도 없어 이래저래 곤란한 것 같다.
앞으로 이상기후와 이에따른 재해는 더 극심해질텐데 먹거리를 수입에 의존하는 상황에서는 좋지 못한 품질의 먹거리라도 비싼 값에 들여 먹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앞으로 더욱 우리의 먹거리에 대해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우리 입에 들어가는 것인데 타인에게 전부를 맡기는 것은 결코 좋은 방법으로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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